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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 가야본성, 칼과 현 | 2020-01-10 14:00~16:00, 전은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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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에서 태어난 김수로 왕, 철의 국가, 그리고 가야금.
가야 하면 떠오르는 것이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국가에 비해 알려진 것이 적다. 42년 김수로왕이 세운 가야는 삼국시대까지 이어지지만 562년에 신라에 병합되면서 민족사로 편입된다. 삼국시대의 세 나라는 패권을 다투었지만 가야는 공존을 추구하며 유지되었지만 결국에는 통합의 힘에 눌려 사라졌다. 가야가 추구했던 공존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해볼 수 있는 전시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마련하였다. <가야본성, 칼과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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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 신난다 프로그램 중 얼마전 참여했던 것이 바로 <가야본성, 칼과 현>이다. 수업 시간에 맞춰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로 가니 이미 선생님과 함께 수업에 참여할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전시실로 들어가기 전, 로비에 앉아 가야에 대한 설명을 먼저 들은 후 입장했다. 셋째가 선생님과 함께 수업에 참여하는 동안 나 역시 따로 표를 구매하여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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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면 컴컴한 벽면에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에 대한 신화 중 삽입가요인 ‘구지가’가 나타난다. 구지가를 보며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파사석탑’이 전시되어 있다. 김수로왕의 비, 허황옥이 서역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고 전해지는 석탑이다. 파도치는 화면 앞의 파사석탑을 보고 있노라면 비록 신화지만 가야의 환상적인 탄생과 함께 전시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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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까지 높은 진열장에 가득한 토기들이 감탄을 자아내는 공간부터 1부 공존이 시작된다. 가야는 가락국, 아라국, 가라국, 고자국, 비사벌국, 다라국 등 여러 나라가 공존하였다. 토기는 가야의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귀한 유물이다. 비슷한 형태의 토기들이 각 나라의 개성에 맞게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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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여러 나라가 공존했을 뿐만 아니라 가야를 이룬 사람들도 매우 다양했다. 바다를 끼고 여러 곳과 교류하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많이 오가며 살았고, 다양한 문화가 들어왔다. 김해 예안리 유적에서 발견된 사람의 두개골은 북방과 남방계통의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가야의 고분군에서는 중국을 비롯하여 북방 유목민, 왜, 신라, 백제, 고구려 등과 교류한 증거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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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산동 44호 무덤을 실제 크기로 표현한 공간은 2부 화합. 가라국의 왕은 수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주산의 언덕에 잠들었으며, 44호 무덤은 길게 뻗은 언덕의 중앙이면서 우뚝 솟은 곳에 있다. 왕의 무덤은 직경이 27m, 높이 6m이고 사방에 32기의 순장 방이 있다. 순장자는 호위무사, 마부, 옷감관리인 등 왕을 모시는 신하들과 그의 가족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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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본성, 칼과 현> 전에는 2개의 국보가 전시되어 있다. 2부 공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국보 제138호 금관. 가라국이 전성기일 때 만든 금관으로 매우 안정적이면서 아름답다. 금관은 가라국이 왕을 정점으로 하는 신분 사회였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독자적으로 정치적 상징물을 제작할 만큼 국력이 컸던 나라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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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옆으로 갑옷이 쭉 늘어진 공간에 들어서면 마치 장군들을 호령하는 왕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3부 힘이 시작되는 공간이다. 가야가 520년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가야의 힘은 문화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철에 있었다. 당시 철은 최고의 첨단 소재로 철을 다루는 기술은 곧 나라의 국력과 직결되었다.
<가야본성 칼과 현>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두 번째 국보 제275호 기마인물형 뿔잔은 가야 중장기병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무사는 갑옷을 입었고, 손에는 칼이나 창 같은 무기류와 방패를 들고 있었다. 말에도 무사와 마찬가지로 몸에 갑옷을 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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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회에서 철 생산은 첨단기술이었던 만큼 그 기술은 비밀스럽게 전해졌고, 전문 장인이 담당하였다. 김해 퇴래리 소업 유적에서는 철기 제작을 관장하던 전문 장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신분을 보여주는 고리자루 큰칼과 철기를 제작하던 도구를 모두 소유하고 있어 비교적 높은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제철기술이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고 관리되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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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본성 칼과 현마지막 4부 번영. 1~4세기 동북아시아는 중국, 한반도, 왜를 잇는 한반도 서남해안의 바닷길을 따라 사신과 상인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때 가야는 철과 여러 특산품이 모이는 당대 최고의 국제시장으로 번영하였다. 그 당시의 번영은 김해 양동리와 대성동의 지배자 무덤에 타임캡슐처럼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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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을 누렸던 가야는 백제나 고구려와 달리 주변 소국을 통합하지 않고 공존을 추구하였다. 강자의 패권으로 전체를 통합하지 않았고, 언어와 문화의 바탕을 공유하면서 각국의 개별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가야가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이었고, 멸망의 원인이었다. 전시장을 나서기 전, 이번 전시를 위해 설치된 ‘사람과 사람의 악기 ver.2’에서 흐르는 연주를 듣고 있노라니 공존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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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보고 나온 후 다시 로비에서 학습지를 풀며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업을 끝낸 후 선생님께서는 부모들에게 오늘 함께 관람한 내용을 리뷰해주셨다.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질문이 '사국시대라고 말하는게 옳을까? 삼국시대라고 말하는게 옳을까?' 였다는 말씀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인식해야하는지 새로운 관점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굉장히 유익했던 전시로 올겨울방학 꼭 가볼만한 전시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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